[김정형의 秘史로 읽는 역사] 세계 전사에 남은 성공한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김정형의 秘史로  읽는 역사]  세계 전사에 남은 성공한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으로 몰려가는 미 육군. 1944년 6월 6일 /자료사진

상륙 앞두고 독일군에 전개한 기만전술

 

2차대전(1939~1945) 발발 후 독일은 진작에 프랑스를 비롯 서유럽 국가 대부분을 점령했다. 유럽 본토에서는 소련 홀로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소련의 스탈린이 제1전선(동부전선)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박을 분산하기 위해 제2전선(서부전선) 형성을 위한 서해안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연합국에 요구했다. 제2전선이란 영국군과 미군이 하루빨리 프랑스 해안에 상륙, 유럽의 서쪽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미국과 영국의 군 지도부가 준비한 상륙작전은 ‘오버로드(OVERLORD)’ 작전으로 불렸다. 자칫 위험한 도박이 될 수도 있었으나 1943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가 캐나다의 퀘벡에서 만나 승인함으로써 오버로드 작전은 구체화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43년 11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회동한 이란의 테헤란 정상회담에서 확정되었다. 3국 정상은 1944년 5월 무렵, 북프랑스 해안에 상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연합군 총사령관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 상륙작전은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군 총사령관이 맡았다. 당시 독일군의 대서양 해안 방어 책임자는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다.


그 무렵 독일군은 연합군의 해안 상륙에 대비해 2년 전부터 노르웨이에서 스페인까지 5,000㎞의 해변에 8,500여 개의 콘크리트 요새를 구축, 이른바 ‘대서양 방벽’을 쌓아놓고 있었다. 그곳에 전차 부대, 방공포 부대, 기관총 부대 등을 배치해 해안선을 철통같이 방어했다. 1944년 들어 영국 남부 해안에 수십만 명의 연합군이 몰려들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 보급품 등이 쌓이고 있다는 정보가 접수되었을 때는 곧 상륙작전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했다. 정확한 상륙 지점은 알지 못했으나 독일군은 프랑스 서해안 방향 브르타뉴, 코탕탱 반도, 파드칼레, 노르망디 등을 상륙지점 후보지로 예상했다.

 

그 무렵 연합군이 확정한 상류지점은 코탕탱 반도의 센강 하구 서쪽에 위치한 95㎞ 길이의 노르망디 해안이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정확한 상륙지점을 눈치채지 못하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하기 위해 다양한 기만전술을 펼쳤다. 역정보를 흘려 상륙 지점이 노르웨이인지 덴마크인지 프랑스인지 헷갈리도록 했다. 때로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 최단 거리에 위치한 프랑스 북부 도버해협의 파드칼레 해안에 상륙하는 것처럼 기만전술을 펼치기도 했다.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파드칼레 해안 맞은편 영국 해안에는 고무 탱크, 나무 수송기, 나무 대포, 가짜 군 기지 등을 설치했다. 혹여 독일군 정찰 비행기가 이것들을 카메라에 담으면 이 가짜 부대가 파드칼레로 향하는 척하고, 파드칼레 인근 지역을 폭격했다.

노르망디 해안 상륙 후 전열을 정비하고 있는 연합군 병력 / 자료사진


독일군이 상륙 지점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연합군 정보망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영국의 천재 과학자 앨런 튜링이 1943년 12월 완성한 세계 최초의 연산컴퓨터 ‘콜로서스’가 독일의 거의 모든 비밀통신을 도청하고 독일의 전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1944년 5~6월에는 독일이 상륙작전 예정지를 노르망디가 아니라 파드칼레로 예상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콜로서스의 도청을 알지 못한 채 전쟁을 치렀다. 히틀러는 파드칼레를 상륙 후보지로 확정한 뒤 서부전선의 300개 사단 중 노르망디 해안엔 불과 8개 사단만 배치했다.


악천후로 하루 연기된 ‘D-day’

 

연합군이 당초 확정한 상륙일은 6월 5일이었다. 기상예보장교가 날씨와 조수를 고려하면 6월 5일과 18일이 가장 적합하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는 6월 5일을 ‘D-day’로 결정했다. 그런데 D-day 이틀 전부터 강풍과 높은 파도 때문에 도저히 작전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출항했던 함정들도 악천후로 귀항했다. 군 수뇌부는 상륙작전을 결행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당시 독일군 기상장교 역시 날씨가 나빠 연합군의 상륙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예측했다. 이 때문에 대서양 해안 방어를 맡은 에르빈 롬멜은 “악천후로 연합군이 1주일 안에는 상륙할 수 없다”며 전선을 비우고 생일을 맞은 아내 곁으로 달려갔다. 다른 고위 장교들도 경계를 풀고 임지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연합국의 기상예보 장교가 6월 5일 오후부터 6일 낮까지는 일시적으로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고 예보했다. 아이젠하워는 기상장교의 보고를 받고 ‘D-day’를 하루 뒤인 6일로 연기했다. 조류를 고려하면 상륙에 적합한 다음 날짜는 보름이나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6월 5일과 함께 작전 예비 후보일이었던 6월 18일쯤에 20년 만의 강한 폭풍이 노르망디 해안을 강타했다는 점이다. 만일 6월 6일 상륙작전을 결행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몇 달 이상 늦어질 수 있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첫날인 6월 6일에만 1만 2,000여 기의 항공기, 7,000여 척의 함선·상륙주정, 2만여 대의 차량을 동원해 15만 6,000여 명의 병력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야말로 육·해·공이 모두 투입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 최대의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 가운데 13만 2,500여 명은 함정을 이용해 바다를 건너갔고 2만 3,500여 명은 항공기로 낙하했다. 연합군은 미군(7만 3,000명), 영국군(6만 1,700여 명), 캐나다군(2만 1,400명)이 주축을 이루고 자유프랑스, 호주, 폴란드, 노르웨이 군대 일부가 참가했다.


6월 6일 새벽 0시 20분,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미군과 영국군으로 구성된 공수사단이 C-47 수송기를 타고 노르망디 해안 뒤쪽에 낙하했다. 6일 새벽 1시 가장 먼저 투입된 것은 공수부대였다. 독일군의 충원과 반격을 사전에 막기 위해 노르망디로 들어오는 거점을 장악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거센 바람과 어둠 때문에 대부분의 대원들이 목표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 한동안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도 공수부대는 독일군 부대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후방 지역을 교란함으로써 독일군의 방어 태세를 흩뜨려 놓았다. 아이젠하워는 D-데이 아침 상륙부대 장병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오버로드 상륙작전이 완벽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면서 그들을 “위대한 십자군”이라 불렀다.

 

세계 전사(戰史)에 남은 '성공한 작전'


상륙전은 새벽 5시 30분 함포 사격이 시작되고 나서 오전 6시 20분 무렵 본격 전개되었다. 5곳으로 구분한 상륙 구역에는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유타·오마하 해변에는 미군, 소드 해변에는 영국군, 골드·주노 해변에는 영국·캐나다 연합군이 상륙했다.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3개 해변에 성공적으로 상륙을 마치고 미군도 유타에서 신속하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역사기록 화가 존 폴 스트레인의 그림 ‘유타 해변’(1975년 작) /자료사진


유타 해변에 처음 도착한 부대는 미 제4사단 소속 제8보병연대였다. 지휘관은 미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큰아들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1887-1944) 준장이었다. 그는 장군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선봉 부대원과 함께 가장 먼저 해변에 내렸다. 미국의 역사 화가 존 폴 스트레인이 그린 ‘유타 해변’(1975)에 그 모습이 잘 담겨있다.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도 한 손으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45구경 콜트자동권총만 든 채 의연하게 걸어가는 모습이다.


그는 1차대전에서 무공을 세웠으나 부상으로 인한 심한 관절염에 심장이 좋지 않았다. 이후 푸에르토리코와 필리핀 총독을 지내는 등 루스벨트 가문의 적자로서 사회적 명망을 누리기에 충분한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도 2차대전 후 조국의 부름에 다시 응했다. 당시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몸이 불편했다. 그의 헌신적인 지휘에 힘입어 유타 해변의 상륙작전은 오마하 해변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 사상자도 적었고 진격 속도도 빨랐다. 안타깝게도 그는 상륙 후 한 달여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57세였다.


해안선에서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은 오후 9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연합군은 비로소 독일군 점령 지역에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강력한 독일군의 저항에 부딪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첫날 하루 동안 4,000여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배경인 오마하 해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3000명에 달하는 미군이 죽거나 다쳤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후에는 “연합군이 승리하는 속도보다 독일군이 패배하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말이 나올 만큼 전세가 연합국으로 기울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18년 동안 5번씩이나 전쟁터를 누비며 사진 취재를 한 당대 최고의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에 의해서도 기록되었다. 카파는 독일군의 총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현장에서 필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필름은 6월 6일 런던에 보냈다. 하지만 아깝게도 현장 조수의 실수로 필름의 유제가 고온에 녹아버려 72컷 중에 겨우 11컷만을 살려서 인화할 수 있었다. 아침 안개가 낀 해안에 상륙하는 병사들의 사진은 입자가 거칠어진 데다 조금 포커스가 맞지 않고 흔들리기는 했어도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사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격찬 받았다.

세계적인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자료사진


오버로드 작전은 연합군이 8월 25일 파리에 당당하게 입성함으로써 마침내 종지부 찍었다. 이때까지 연합군은 3만 7,000여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일군은 30만-4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9월 11일 마침내 미군 정찰대가 프랑스에서 독일 국경을 넘어섬으로써 2차대전도 종착점을 향해 달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처음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서부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2차대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전사에 성공적인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후 현대 세계 상륙작전의 전형이자 합동작전의 성공적 사례로 인정받았다. 이전에도 합동작전이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토록 육·해·공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작전을 수행한 사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최초였다.

 

이중간첩 가르시아의 활약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으로서는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성공작이지만 나치 독일로서는 한탄이 절로 나오는 정보 실패였다. 독일이 상륙 지점을 오판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지만 스페인 출신의 이중간첩 후안 푸홀 가르시아의 역할도 컸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스페인은 중립을 표방했기 때문에 영국과 독일 스파이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스페인 출신의 후안 푸홀 가르시아도 독일 나치즘에 저항하는 스파이로 활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국이 거부하자 독자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기 위해 독일 정보 요원에게 접근했다. 독일 요원은 스페인의 외교 공무원이라는 가르시아의 말을 믿고 독일의 스파이로 채용했다. 가르시아는 포르투갈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다. 그가 독일 쪽으로 보낸 정보 중 조작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정체가 곧 드러나야 했으나 독일군은 정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독일의 동맹국에 있다며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르시아는 발각될 것이 두려웠다. 포르투갈 주재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미국은 이중간첩의 효용성을 인정해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도록 주선했다. 가르시아는 1942년 4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정보부(MI5) 요원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정보원들을 구했다고 독일에 보고했다. 자기가 만든 가짜 인물들의 성격과 직업, 협조 이유, 관계 등을 보고해 독일 정보부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가르시아는 1944년, 좀 더 담대한 작전을 구상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독일에 넘겨준 다음, 그것은 가짜 상륙 작전이고 대규모 상륙 군대가 파드칼레로 갈 것이라는 역정보를 흘려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다. D-day인 6월 6일 새벽에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무선을 보냈다. 실제로 연합군이 이미 영국을 출발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보낸 정보는 틀린 정보가 아니었다. 다만 독일이 방어망을 강화한 곳은 파드칼레였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마련할 대책은 현실적으로 없었다.

스페인 출신의 이중 스파이 후안 푸홀 가르시아/자료사진


가르시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이틀이 지난 6월 8일 자정 무렵, 마지막 거짓 정보를 독일로 송출했다. “현재 진행 중인 연합군 공격은 대규모의 교란 작전이다. 이것은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적의 함정”이라며 당시 노르망디 해안에 들이닥친 상륙군은 미끼이고 곧 더 큰 규모의 대군이 파드칼레로 상륙할 터이니 그곳에 방어군을 집중 배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첩보’는 히틀러에게까지 전달되었고 독일군의 주력 부대는 노르망디 해안으로 향하다가 길을 돌려 파드칼레로 향했다.


6월 말에 이르자 가르시아는 더 이상 거짓 정보를 제공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영국 정보부는 그를 체포한 것으로 처리한 뒤 몰래 석방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독일은 가르시아가 독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1944년 철십자훈장을 수여했다. 몇 달 후에는 영국 정부가 연합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영제국 기사훈장을 수여했다. 이처럼 적대국의 훈장을 동시에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종전 후 가르시아가 나치 잔당의 보복으로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자 영국 정보부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앙골라로 보냈다. 가르시아는 1949년 앙골라에서 말라리아로 죽은 것으로 위장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35년 후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40주년(1984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았는데 그동안 그는 베네수엘라에서 서점과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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